- 과학과 성경, 특히 창조는 ’24/8/10
- 기독교 경건의 핵심은 ’24/6/29
- 유럽이나 한국이나 ’24/6/28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 ’23/7/20
- 챗GPT: 진실과 진실의 ‘레토릭’ ’23/2/21
- 다소 도식적이고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서방 신학은 ’22/10/7
- MZ 세대라 ’22/9/7
- 고난 주간을 지나며 고난을 생각해보다 ’22/4/15
-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보고(1), (2) ’21/9/28, 10/14
- 인간관계에서 종종 화가 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됩니다 ’21/8/1
- 맞이할 너 ’21/5/26
- 기독교에도 수행(修行)이라 할 만한 것이 있는가? ’21/4/16
- 교회는 잉여의 힘 ’21/2/5
- 모빌리티, 제국 ’21/1/29
- 편식과 한 상 ’21/1/26
- 믿음과 실천 ’21/1/19
- 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 ’20/10/23
- 신 존재 신앙 결단에 대해 ’20/10/21
- 주기철 목사의 세 가지의 신앙 ’20/4/25
- 新부족 사회의 도래 ’20/4/24
- 삼위일체론의 한 하나님과 삼위 ’19/9/1
- 근대인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 ’19/5/17
- 敎會가 좋을까, 交會가 좋을까 ’19/5/4
- 중생과 보살 ’19/5/2
- 교회와 권력 ’19/3/2
- 그리스도인의 윤리: ‘닮음’과 ‘하물며’ ’19/2/27
- 삼위일체론의 한 하나님과 삼위 ’19/1/9
- 방언에 대하여 ’18/12/7
- 성격과 죄 ’18/11/22
- 독생자는 하나님의 '품속'에 있었다 ’18/10/15
- 하나님과 질투 ’18/8/20
- 루터(개신교) 신학의 유명론적 위험 ’18/7/28
- 죄악의 기원과 추동력에 대해 ’18/6/23
- 미국 건국 신화와 인권 ’18/5/25
- 개인의 정체성 ’18/2/18
- 스피노자, 범신론, 욕망의 경계 없음 ’18/2/18
- 완전한 실패자의 감사 ’18/2/8
- 기계가 모든 것을 대체하는 시대에 즈음하여 ’18/2/1
- 죽을 몸과 정직함: 전도서에 대한 한 단상 ’18/1/28
- <서시>를 읽으며 ’17/10/26
- 만나의 또 다른 측면 ’17/10/13
- 그리움과 영원 ’17/10/4
-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함 ’17/7/23
- 파리지옥이 꽃을 피웠다 ’17/7/22
- 죄가 더한 곳—십자가의 뜻 ’17/6/11
-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17/2/15
- 구 목사 목회론(직분론/교회론) ’15/12/17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15/6/6
- Ecclesia viatorum(길 위의 교회)을 위하여: 주의 나라와 영광 이곳에 - 옹기장이 ’15/6/3
-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15/5/22
- ≪가나안 성도 교회밖 신앙≫을 읽고 ’15/2/23
- 술 권하는 사회? ’13/12/10
- 구약성경에는 해석적 여백(혹은 ‘구멍’)이 존재한다 ’13/5/24
- 어느 보드리야르빠의 군시렁거림 ’12/8/13
- “내가 네 누이인줄 알았냐…?” — <여우누이뎐>에 대한 단상 ’12/7/20
- 모든 신자의 직분 ’11/10/6
- 김상봉 교수님 인터뷰 보고 든 이런 저런 생각들 ’11/10/5
- 성경론에 대해 토론한 내용 중 4 ’10/10/7
- ≪긍정의 힘≫을 읽고 ’10/7/27
- 내가 생각하는 메가처치의 근본적인 문제 ’10/5/8
- 세속적 통치와 영적 통치 ’10/5/6
- 메가처치, 대형교회? ’09/11/27
- ‘안’ 좋으신 하나님 ’08/2/19
-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 토론한 내용 중 ’07/1/24
- 아나타시우스신경[Symbolum Athanasianum] 해설 ’06/4/29
- 영화 <올드보이>를 보고 ’03/12/30
-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03/11/19
- Irony ’95/11/19(첫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