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1) ― 모퉁이돌 예수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책을 끼고 산다. 제아무리 책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일단 기독교인이라면 신앙을 위해 성경책 읽을 필요가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사를 보면 수많은 전통과 예배 형식, 그리고 문화마다 다양한 버전의 기독교가 성립되어왔다. 이러한 역사의 퇴적물을 연구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람도 준다(나 역시 이런 작업을 하고 있다). 게다가 현재의 교회와 신앙에 대해 시사점을 준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그 모든 오래되고 다양한 버전의 기독교들은 한 손에 잡히는 이 성경책을 근거로 성립된 것들이라는 점이다.
심지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이미 성경(구약성경)은 존재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단지 초자연적인 능력을 드러내심으로써 당신이 신적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신 게 아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자기 신성(神性)을 드러내는 존재라면 굳이 성경이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은 당신의 대적자들을, 철저하게 구약성경을 중심에 두고 상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구약을 읽으시는 방식이 있고, 이 방식이 기존에 형성되어있던 유대교의 독법(讀法)과 충돌하였기에 대적자들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이 유대교 구약독법을 충실히 따르는 분이었다면 예수님은 사두개인들 정도와 대립각을 세웠지, 바리새인, 열심당 등 대다수 反로마-反기득권 개혁 세력의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소위 ‘기독교’라는 이름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삼으려 한다면 구약성경에 대한 입장을 정하는 게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을 ‘신구약’이라고,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좀 더 엄밀하게 역사를 살펴본다면, 구약성경을 자기 경전으로 삼는 종교는 메이저만 해도 세 개다--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이 각각의 종교에는 구약 말고 그 구약에 대한 독법을 규정하는 문서집들이 존재한다 ―탈무드, 신약성경, 꾸란. ‘그래, 결국 해석의 문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기 전에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약 독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도들은 구약을 어떻게 읽어 내었는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친저(親著)를 한 권도 안 남기셨는데, 어떻게 사도들의 기록물이 ‘예수교’의 근간이 되었는지. 이런 의문이 기본적으로 예수교 내지는 기독교에 헌신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근본적으로 대답이 되어야할 문제인 것이다.
기독교가 성립한 이래로 성경전서에 대해 무수한 주석이 있어왔다(나머지 두 종교도 사정은 마찬가지겠지만). 결국 이러한 주석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다. “주석이 없이 성경만 읽어도 즉시 이해가 되는 것.” 주석을 공부하면 할수록 성경 말씀 자체가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진다면 그런 주석들의 효능에 대해서는 재고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주석을 읽는 데에, 그리고 쓰는 데에 수많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면 주석은 이미 주석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려도 무방할 것이다. 교회의 지체 중 누구나 주석할 수 있고 누구나 그 주석을 평가할 수 있어야 제 역할을 하는 주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신약의 위치 자체가 구약에 대한 주석집이라 할 수 있다. 신약의 장르야 서간, 역사 서술 등으로 다양할지 모르나 결국 어떤 식으로든 구약 성경에 대한 주석적인 입장을 근간으로 한다.
‘해석’이라는 것은 항상 ‘성경의 주석의 주석의 주석의 주석의 주석의 ··· ∞’라는 무한소급을 어느 지점에서 멈추게 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해석의 무한소급을 멈추게 하는 굄돌은 ‘텍스트 밖’에 존재한다. 하나의 해석은 시간이 지나 넓게 소통이 되고 나서는 역시 해석의 무한소급을 통해 텍스트로 편입된다. 따라서 텍스트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밖은 항상 안이 된다. 우리가 ‘모든 것은 해석의 문제’라고 할 때, 결국 전제하는 것은 이러한 해석의 무한소급성인 것이다.
기독교 복음이 ‘선포’, 좀 유식한 말로 ‘케리그마’라 자칭하는 것은 텍스트 안에 해석의 무한소급을 멈추게 하는 굄돌을 구비하고 있다는 선언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이다. 케리그마니, 십자가니 하는 이야기도 이제는 너무도 소통이 되고 식상해져서 다시 해석의 무한소급 속으로 편입된지 오래이긴 하지만, 우리는 ‘성경의 주석의 주석의 ···’에서 성경을 넘어서지 않고 성경 안에서 굄돌을 찾고, 그 굄돌이 어떻게 ‘고이고’ 있는지를 확정해야 할 것이다.
모퉁이돌이자 굄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태초’로 하여 읽어나가는 것이 성경인 것이다,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2) ― J에게,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J에게.
J야, 얼마 전에 네가 내게 물었던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확실히 알까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함 답해볼게. 대답을 더 미루는 것은 이제는 실례가 될 것 같구나. 네가 한 질문은 정말 오래된 질문이기도 하고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번쯤은 던져봤음직한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때, 결국 ‘성경’이라는 책을 도외시하고 알 수는 없는 노릇이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서 굳이 성경 없이도 하나님 혹은 신적 존재를 만나고 알 수 있다면 성경을 저리 치워 놓고 내 안의 음성이나 내 밖의 징조들을 잘 관찰하면 되겠지.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결국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내가 너보다 더 어렸을 고등학생 때부터 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진지하게 묻기 시작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사춘기를 지나면서 꽤 진지한 신앙이 형성되고 내 나름은 하나님을 만났다는 체험 역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즈음 여러 사건들과 경험을 통해, 제아무리 깊은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결국 성경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군데를 알아보고 자문도 구하고 해서 내가 선택한 것은 당시 막 시작되던 ‘QT운동’이었다. 나는 꽤 열심을 내었다. 이제 출간되기 시작하는, 잘나가는 모출판사의 큐티 잡지를 다달이 사보다가 급기야 정기 구독 신청을 했다. 독학(?)으로 큐티를 학습하고 정통 교재(?)를 정기 구독하고 매일 큐티 노트를 쓰곤 했다,빽빽하게. 그리고 다시 읽으면서 스스로를 대견해 하기도 했다. 이게 몇 년이 쌓이니 그 자체로 내 인생 기록이었고 내 신앙의 여정이 되더구나. 나름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내게 ‘턱’ 하고 걸리는 말씀 한 구절이 있더구나.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5장 39절 말씀이다. 여느 때처럼 이 말씀을 어떻게 ‘오늘 내 삶’에 적용을 시킬까 하면서 메스를 들이대었는데, 이 말씀에는 결코 내 큐티 메스가 들어가지 않는 것 아니니.
너도 함 이 말씀을 읽어 봐봐. 그래, 난 성경에서 영생을 얻으려고 성경을 지금 읽고 있잖아. 이 ‘영생’에는 ‘내 삶의 지침’, 그리고 그 지침대로 잘 살아서 얻을 ‘안심’, ‘행복’, 이런 게 다 포함되지 않겠니? 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구원은 ‘총체적’이니 말이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자 예수님의 뜻이자 성령님의 뜻이자, 뭐 그렇지 않느냐 말이지. 그런데 잘 읽어봐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는데, 이 사람들아, 성경에서 너희 영생 찾지 말고 나를 찾으란 말이다, 성경은 영생 및 안락을 너희에게 제공하려 있는 게 아니라 나를 증언하려고, 나를 가리키고 있단 말이야!’ 이게 예수님 말씀 아니니?
아, 머리가 띵해왔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뜻은 결국 내 영생이고 내 삶이 정돈되어 잘 진행되고, 이런 것 아닌가. 내 영생을 위하여 움직이시는 분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아니신가. 그걸 위해 성경을 주셨고. 그래서 지금 내가 읽고 내 삶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저런 말씀을 하셨나. 이때까지 밝디 밝았던 모든 말씀들이 순식간에 흑암으로 뒤덮이더구나. 그때부터 난 ‘나’, ‘나의 삶’을 성경읽기에서 밀어내고 진짜 성경이 도대체 뭐를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제대로, 정말 제대로 하나님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지. 긴 세월을 요한복음을 읽으며 겨우 알게 되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생이 결국 성경이 증언하는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사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야. 일종의 ‘개안’을 경험한 것이지. 결국 성경은 나를 세우고 나를 가꾸고 포장하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통해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읽는 것이라는, 정말 더없이 평범하지만 외면되고 있던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야. 성경의 목적 자체가 당신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 바울도 복음을 정의하면서 로마서 1장 2절에 이렇게 쓰고 있구나.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개안을 하고 난 뒤에 내 큐티 노트를 되돌아봤을 때, 딱 두 가지 주제로 집약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더 나은 내 모습을 향한 몸부림’, ‘장래에 대한 (기대로 포장한) 염려.’ 결국 성경도 이 두 가지 주제에 맞추어 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철저한 내 실존의 외침이었다는 것도. 장래가 불투명한 고교생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만족할만한 내 모습 = 보장되는 장래’라는, 아주 실존적인 도식을 세워 놓고 있었던 것이지. 그리고 이것은 젊은 우리가 비판하곤 하던 당시 기성세대의 기복신앙과 본질적으로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이후에 깨달아 가기 시작했다.
매일의 말씀 묵상은 매일의 삶을 위해 소비되었다. 하나님은 항상 내 삶을 근거지우고 나의 행위를 정당화하시는 분으로 나타났고. 성경은 내 삶의 참고 문헌이 되고 하나님은 각주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이라는 책의 저자가 되었고. ‘자기 아들을 나를 위해 죽게 하실 정도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소중하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항상 나를 세우는 데 도용되었더군. 이건 QT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말씀을 내 삶에 소비하고자 하는 ‘나’의 문제지.
이런 상황에서는 ‘점치는 것’은 반드시 생겨나게 된다. 나는 항상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하는 물음을 던졌다. 이것은 거룩함으로 포장한 점이었다. 점(占)은 궁극적으로 항상 나의 신변 보장과 안전을 향한다. 내가 이런 물음을 던진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행하면 일이 꼬일 것이다’, ‘하나님의 뜻인 것을 해야 제일 잘 된다’라는 생각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이건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을 위해 묻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묻는 것이고, 점치는 것과 아주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점치는 것은 알다시피 성경에서 금지되어있다.
후에 성경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내 실존이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 아래 있는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는 자유로운 듯 하지만 실상 나 자신에게 묶여있다. 내 삶을 보장하는 모든 것, 그리고 내 삶을 도덕적으로든 실리적으로든 정당화시키는 모든 것은 일종의 율법이라 할 수 있다. 이 율법을 가지고 나를 정죄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롬 2:14-15). 그리고 이러한 실존적인 인간을 성경에서는 ‘죄인’이라 한다. 이 선언은 극단적인 것이다. 실상, 도덕과 체계가 없는 인간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고 인간 존재는 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하지만, 복음이 제시하는 상(相) 자체는 부인할 수 없었다.
‘나를 정죄하는 나’는 사디스트가 아니다. 정죄의 목표는 항상 ‘더 나은 나’이다. 지금의 구질구질한 나를 허물 벗듯 벗어던지고 거룩한 나, 순결한 나를 향한 몸부림이 바로 율법을 통한 정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워지려 한다. 그리고 이 율법은 항상 ‘신적인 것’, 즉,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으로 정당화된다. 더불어 나도 신성화되는 것이다. 내가 목표로 하는 순수 자아는 하나님에게 인증 받은 그런 형상이다. 그러므로 우상은 항상 “자기를 위하여” 새긴 것이고 결국 자기 모습이다. 이 우상은 내가 만든 것이지만, 살아나 나를 지배한다.
괘발새발 길어진 글을 마무리하자면, 결국 성경읽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나님을 빌미로 나를 사랑하느냐’에서 결판 난다고 봐. 복음이 종교가 되는 것도 하나님을 통해 나를 사랑하고 내 모습을 확인하고 긍정하고 나를 세우는 것에서 출발하지.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 본연의 구원 욕망을 중심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복음을 진정으로 아는 자, 그는 나에 대해 죽고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할 수 없으니까, 아니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자꾸 딴 것을 끌어들이는 게 아닐까.
만약,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한다면, 그래서 그분의 신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다면, 그냥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자유롭게. [물론,고민할 건 고민하고 노력할 건 노력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말고. 유치원에서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배우고 있고, 또, 알고 있잖아.^^]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사는 사회에 기여도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불의는 바로잡고 해야할 일은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라는 말에는 많은 것들이 담길 수 있겠지만, 여기서 다 이야기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구나.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방종으로 떨어지지 않아야겠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간다. 이게 인간 조건이야. 그래서 자녀를 아주 공을 들여 키우고 부부가 서로 존경하고 사랑해야지 제대로 된 사회가 유지가 될 수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에 대한 지식이 자라가면 자라갈수록 우리는 그분을 닮게 되어있다. 이건 어떤 윤리를 정해 놓고 실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가 자라면 철이 들고 식견이 생겨 또 어른이 되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와중에 여러가지 지식 체계나 윤리 체계 등도 습득을 하게 되지만,본질은 ‘생명의 자라남’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내 안에 떨어진 하나님 말씀의 씨(벧전 1:23)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도록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는 와중에 지식이 생기고 식견이 생겨 만사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 결국 우리는 개인으로서 예수 복제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서로’ 사랑으로 교통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를 드러내는 거지. 한 두 마디로 끝내기에는 참 긴 시간이 필요한 여정이긴 하다만, 어쨌든 대충의 얼개는 이렇다는 거지.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너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대답이었으면 좋겠구나.
그럼, J야, 늘 건강하고,,, 마지막으로 말씀 한 구절로 이 편지를 갈음하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3) ― S에게, 상(像)을 만드는 인간(homo imaginans)
(신 4:11~13)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 유암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 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골 1:15) 그(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S야, 요즘 네 글을 잘 보고 있다. 네 고민의 절박함이 네가 글을 올릴 때마다 묻어 나와서…^^ 같이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같이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한 마디 적어본다.
사람마다(뭐,문화, 시대, 사회 등으로 바꾸어도 관계없겠다) 속에 신(神)에 대한 상(像)이 있다(본유적이라 하든 습득된 것이라 하든 관계없겠다). 사실 성경을 안 뒤적여 봐도 ‘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공통적인 대답이 존재한다. 이것의 세부적인 사항 다 생략하고 딱 요체만 말하는 4자성어가 있다 ― 弘益人間. 모든 신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함’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어떤 모양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그 모든 다양함들은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것에서 한 목소리를 낸다. 여기서 ‘인간’을 ‘삶’이라 바꾸어도 관계없겠다. 신은, 신이라 불린다면 그는 인간과 삶, 즉 인생에 봉사하는 존재여야 한다. 여기서 벗어나면 결코 신이라 불리지 않는다. 어떤 의미로든 삶에 봉사하는 것이 확정되어야 인간은 그를 두려워하기도 하고 예배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안 뒤적여 봐도’란 말은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이미 먹고 들어가는 게 있다는 거지. 어느 정도 확정된 신상(神像), 우리에겐 이게 있다는 거지.
근데 말야, 함 생각해봐. 성경을 안 뒤적여 봐도 알 수 있다면 뭐 성경이 필요하겠냐. ‘성경’이라는 거창한 이름자 쓸 필요가 있냔 말이지. 아, 성경은 신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삼위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니까 성경은 필수적이다, 뭐 이래 말할 수 있겠네. 예수님 모르면 구원 못 받잖아, 이러면서. 근데 말야, 또 함 진지하게 생각해봐. 성경을 읽고 난 뒤 삼위 하나님 알았다 치자. 근데 기존의 신상(神像)이 여전히 안 바뀌었다면 성경의 말들을 장악하는 건 기존의 신상인가, 아님 성경 자체인가…? 말이 좀 꼬인다는 것 인정한다.
예를 들어보면 좀 쉬울 거야. 신이라면, 배고파서 음식을 간절히 갈구하는 사람에게 음식을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감? 근데 왜 출애굽한 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고기 달라했다고 박살 내나…? 그 본문 마음 비우고 잘 읽어봐. 이스라엘이 정말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했는지. 배고프면 밥 찾는 게, 그야말로 인간 본연의 외침 아닌가. 그걸 ‘탐욕’이라 부를 자, 그 누군가? 근데 여호와라는 신은 그걸 탐욕이라 부른다(민 11:34). 너는 욥기에서 친구들과 욥의 말이 둘 다 맞다고 했는데 과연 그럴까? 친구들의 하나님은 분명 성경 없이도 도출할 수 있는 신, 네가 말한 대로 ‘인과응보’에 충실히 따르는 신이다. 근데 욥을 의롭다 하신 하나님도 과연 그럴까? 혹시 그 두 하나님은 다른 존재가 아닐까? 아들을 풍풍 낳게 해줘도 시원찮은 판에 독생자(이삭)를 죽이라고 하는 행위(직계비속살인)를 명령한 자, 그는 과연 신이라 불릴 수 있을까? 나라를 배반한 매국노(라합)를 의인의 반열, 게다가 메시야의 계보에 떡 등재시키는 그 존재, 그를 과연 신이라 할 수 있을까…? 뭐 다른 예들도 많지.
마음을 비우고 읽어보면 성경은 기존 신상에 안 맞는 이야기들을 너무 많이 한다. 사실, 성경 독서의 출발점은 ‘신상 부수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이 누군지, 아니 뭔지 모른다, 이 무지를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 여기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신에 대한 관념들을 일단 판단 유보하고 성경을 읽어야 된다는 말이지.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홀로 주권자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런 모든 말들을 일단 비워내는 것이 급선무라는 거지. 이런 말들을 철회하지 아니하고 성경 봐서는 띄엄띄엄 읽게 된다. 하나님은 분명 사랑인데 왜 가나안 족속은 유아까지도 멸절시키나… 등등의 질문을 덮고 지나가게 되는 거지. 뒤의 것은 분명 사실이라 철회할 수 없고, 그럼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 되는데 이거 무너지면 절단 나는 거잖아,^^ 신이 아니라는 게 되니.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사랑’과 성경이 생각하는 ‘하나님=사랑’이 다르다고 딱 인정하고 ‘그게 뭘까’ 이렇게 들어가면 되는데, 이걸 안 한다. 하나님은 세상이 사랑이라 부르는 존재와 싱크로율 100%일 수는 없구나, 하나님 나름대로 사랑을 정의(定義)하는 방식이 있구나, 이런 생각을 안 한다. 왜? 이건 기존의 신상을 포기하는 것이니까.
뭐 이야기가 자꾸 길어지니 더 길어지게 하기는 그렇고, 요약하자면 성경은 기존의 신상, 즉 ‘내 삶에 봉사하는 신’을 훼파하고 무너뜨린다 ― 이게 성경의 존재 의의 중 하나라는 거지. 만약 여호와라는 신이 브라흐만이나 천지신명과 양상만 다를 뿐 같은 부류의 존재라면 성경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 정직하게 종교다원주의적 사고를 하면 된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렇게 결론 내리고 지나가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거든.
쩝, 이거 완전 괘발새발 되었는데, 어쨌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의 첫머리인 창세기 1장 1절은 ‘신’을 이렇게 정의한다 ― ‘창조주’. 너희가 나를 만든 게 아니라 내가 너희를 만들었다. 생각해봐, 홍익인간의 신은 누가 만들었는지. 아무리 영원한 존재, ‘무소부재한 존재’라고 스스로를 우겨도 그가 나온 곳은 인간 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인간은 ‘像을 만드는 존재’다. 자기를 이롭게 하는 상, 램프의 지니. “신 16:22 자기를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참 상(像)되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마귀가 인간을 대표하여 그리스도를 시험했다. 돌을 떡덩이로 만들라,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나에게 경배하여 권력과 재물을 취하라 ― 이것 중 기존 신상에 어긋나는 것이 하나라도 있나! 마귀는 예수님보고 그야말로 ‘신의 아들’임을 증명해라, 이래 말한 거지. 근데 예수님은 그걸 거부하셨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을 통해 그분의 아버지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는 어딜 향하고 있을까…?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4) ― 개혁주의적 접근
(십오 여년 전, 전모 목사의 설교에 대해 논의하면서 쓴 글)
전XX 목사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말씀을 대하는 방향성이라고 생각합니다(어쩌면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해당하는 문제일 수도 있겠습니다). 전목사님의 인격 문제나 독단성 등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다음에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직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그 외의 방편은 '없습니다'(이 커뮤니티가 개혁파 신앙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례와 성찬도 방편이지만, 일단은 이 논의에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조차도 말씀에 의해 해석되었을 때에야 유효합니다. 우리는 개혁파 신앙고백을 따라(특별히 이 부분은 '제2 헬베틱 신앙 고백'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과 '설교'라고 고백합니다.기록된 말씀이나 선포되는 말씀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는 별 이의가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 세대에서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를 가지는 분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설교와 개혁파에서 말하는 설교는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설교직은 은사를 받은 자가 일정한 교육을 거쳐 교회 전체에서 인정되었을 때 받는 직분입니다. 한 사람의 설교자를 세우기 위해서는 '원칙적으로는' 수많은 세월 동안, 적어도 그가 공적인 설교자가 될 때까지 계속적인 검증을 거쳐 나갑니다. 거기에는 교육도 포함이 되겠지만, 교회가 설교자의 '메시지'를 검증하는 것이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개혁파에서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언명하는 것은, '설교자'라는 직분 자체에서 나오는 권위라기보다는, 그 설교자의 메시지가 '성경적'이기에 나오는 권위입니다. '목사라서' 하나님 말씀을 설교하는 게 아니라, '목사라면' 하나님 말씀을 설교해야 한다는 게 개혁파의 설교관입니다.
그러면 "누가 판단합니까?" "영적인 사람들이 판단합니다." 이 표현들은 제2 헬베틱 신앙고백에 나오는 표현들입니다. 거기서는 성경의 '사적 해석'을 금하고 있습니다(만인 사제 원칙에 의거한 성경의 사적 해석과는 다른 맥락입니다. 로마 교회의 사제가 아니라도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고 해석 강론할 수 있습니다). 이 고백서에 나오는 성경의 사적 해석은 다름이 아니라 '성경적'이지 않은 해석틀을 고안해 내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이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성경 자체에서 제공하는 해석틀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검증되나요, 기독교인 수만큼 해석틀이 존재하는데요? 사실, 여기서 개혁파 성경 해석 원리의 '초월성(?)'이 나옵니다. '성령이 내주하는(영적인) 사람들'이 해석하는 방식이 '성경적'입니다. 이러한 대답은 공교회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이것은 '전통'에 대한 믿음과는 다릅니다).
그 다음에 물어야 하는 것은 '영적인 사람들'은 그렇다면 무엇을 믿느냐, 어떻게 성경을 보고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게 개혁파 신앙고백서들이, 형태는 각각 다르지만 해명하려고 하는 요점입니다.
우선,개혁파 신앙은 성경을 '저자 중심', '텍스트 중심'으로 접근합니다. 성경은 우리 삶의 자리를 위해서 읽는 책이 아닙니다.성경은 그 책을 지은 하나님 때문에 읽는 책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실천' 문제를 들고 나오는 분들이 있겠습니다. 개혁파 신앙은 '감사'라는 개념으로 이것에 접근합니다(특히 이것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잘 나와있습니다).
성경 텍스트를 '매뉴얼'로 사용하는 것은 非성경적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편지'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편지를 읽고 난 뒤 '반드시' 실존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실존적인 변화를 한 마디로 '감사(하는 삶)'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몰랐던 한 분을 알고 난 뒤, 그리고 사랑이 시작된 뒤 반드시 삶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연애를 하면 삶이 변하듯... 그런 종류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전제하고 성경을 보는 것을 개혁파 신앙에서는 매우 경계합니다. 나의 단아한 삶, 심지어 내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해 성경을 보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내 말(言語)의 세계 안에 성경을 가두는 게 아니라, 말씀 안으로 내 실존이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치와 희망을 전제하고 삽니다. 그 눈으로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성경을 봅니다. 그러므로 개혁파에서는 '회개', '자기부인'--특별히 말씀을 보는자로서--을 강조합니다. 항상 자신의 욕망 체계를 분석하고 깨뜨려야 합니다(그것이 기복적인 신앙이든, 아니면 해방신학처럼 숭고한 가치든, 전제하고 들어간다는 면에서는 다 같습니다. 심지어 '개혁주의'라는 것도 끊임없이 검증받고 '전제'의 자리에서 떨어져 내려와서 말씀 밑에 납작 엎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이 없을 때 개혁파 해석 원리는 파괴적입니다.
전목사님은 실상, 우리 시대의 성경 해석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매뉴얼로 대하는 것이지요. 전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면 '어떤 목적'을 위해 성경이 끼워 맞춰집니다. 전목사님이 젊은이들의 호응을 받는 것은 그분이 설정하는 '목적'이 젊은이들의 구미에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계속 참신하고 호소력 있는 목적들만 잘 개발해 나간다면 전목사님의 인기는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인기를 얻고 있는 'QT'도 생각해 볼 문제가 많습니다. '나의 하루의 삶'이 큐티하는 사람들에겐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루의 삶을 위해 말씀을 본다는 것은 아주 고상하지만, 역시나 성경을 매뉴얼로 대하는 것입니다. '하루의 삶'에 '오늘 본문'은끼워맞춰집니다. 하루를 위해 주역을 보거나 논어, 도덕경을 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좋은생각≫이라는 잡지가 큐티잡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긴 뒤 생겨나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생각해 볼 만합니다. 굳이 '성경 본문'이 없어도 '하루 삶거리'는 충족이 된다는 말이겠죠...)